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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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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에 해당되는 글 712

  1. 2019.06.02 교회를 떠나라
  2. 2019.05.26 행복한 자장면
  3. 2019.05.19 우리가 가는 길
  4. 2019.05.12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
  5. 2019.05.05 타자(他者) 앞에 서기
  6. 2019.04.28 부활로 살아라
  7. 2019.04.21 부활을 읽어라
  8. 2019.04.14 무덤에서 일상으로
  9. 2019.04.07 불편한 복음
  10. 2019.03.31 끝을 시작으로 만드는 복음

교회를 떠나라

2019. 6. 2.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02. 주일 오전예배

히브리서 11:5-6


 

교회가 신앙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신앙생활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없던 시절에도 하나님의 구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에녹은 성전이나 율법이 없던 시절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받는 사람입니다(참고, 창5:21-24). 에녹이 보여주는 구원의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요? 에녹은 교회중심으로 신앙생활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1. 믿음은 '사실'을 '현실'로 만드는 것입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아담도 여전히 생존하던 때입니다. 조상들이 경험한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적 '사실'들이 에녹에게는 실제하는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실체적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나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관계는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내러 그는 365년의 짧은(?)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2.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간다'(헬: 프로스에르코마이)는 의미는 '자신을 드리가', '보여주다', '가까이 접근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발걸음에 우리의 발걸음을 맞추어서 목표, 방향, 속도 등을 맞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드러내 함께 걷는 것입니다.

3.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은 목적이 아니라 보상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를 히브리어로 '바카쉬'(시27:8), '솨하르'(시63:1), '다라쉬'(암5:6)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간절히 기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어 동행하는 삶을 위해 간절희 사모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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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장면

2019. 5. 26. 15:18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5. 26.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7:6-11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보다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 때문에 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니의 특별한 은혜로 택함받은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전적인 은혜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1. 스펙은 없어도 스토리은 있어야 합니다(7-8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려한 '스펙'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택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자랑할 거리는 없어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의 이야기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2. 외형이 아니라 맛으로 승부합니다(8절).
40년을 광야에서 생활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볼훔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함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경험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특별한 은혜를 맛보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3. 한 사람이 전체를 책임집니다(9-10절).
세상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받는 모습이 곧 세상 사람들이 복 받는 모습이며, 그들의 실패가 세상의 실패입니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한 민족, 한 가문을 살릴 수 있습니다.

4. 다른 것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11절).
비록 현실은 고단해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삶의 여정을 묵묵히, 그리고 담대하게 살아갈 때 오히려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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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길

2019. 5. 19. 15:05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5. 19.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1:13-17


 

예수애교회가 걸어오는지도 어느덧 11년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온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지금까지 걸어왔고, 걷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걸어가야 할 신앙의 목표를 예수님의 오김을 준비하였던 세례 요한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또다시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경건(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시대(딤후3:5)에 살면서도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세례 요한을 통해 우리의 가고 있는 믿음의 길을 점검해 봅시다.

1. 거룩함으로 걸어갑니다(15절).
'거룩'이란 어떤 신령한 상태가 아니라 '구별' '다름'이란 의미입니다. '주 앞에 큰 자', '포도주나 독한 술...', '성령 충만함' 등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저인 삶과 '구별'되는 거룩을 의미합니다. 세상 기준이나 인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광야같은 곳에서 혼자 외롭게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2. 복음으로 살아갑니다(1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실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합니다(17절).
교회의 사명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이 인정받는 곳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전하고, 가르치고, 인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 '아버지의 마음', '거스르는 자를 위인의 슬기'로 사람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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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의 갈림길

2019. 5. 12. 15:22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5. 12. 주일 오전예배

열왕기상 12:25-33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게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다윗의 길'이란면,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삶이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참고, 왕상 11:35-38) 북이스라엘을 건국하는 큰 업적을 행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의 신앙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1. 사람의 전통을 따랐습니다(25절).
세겜, 부느엘(브니엘) 벧엘, 단, 등의 공통점은 야곱의 흔적이 있는 곳입니다. 날 이름도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인 '이스라엘'이듯, 자신만이 야곱신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알리고 싶어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야곱이 아니라, 야곱이 믿었던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따르는 전통은 자칫 본질에서 벗어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2.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섬겼습니다(26-30절).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웁니다. 이것은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리함과 사람들에게 인기와 관심있는 것들을 만들어 그들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편리', '유익', '인기'가 하나님의 은혜는 아닙니다.

3.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28절, 31-33절).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 모든 예배의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뜻에 따라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여기고, 산당을 짓고, 보통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고, 절기를 정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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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他者) 앞에 서기

2019. 5. 5. 15:1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5. 05. 주일 오전예배

마가복음 10:17-22


 

믿음과 믿음생활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믿음'이라면 '믿음생활'은 주변 사람들 속에서 보여지는 믿음의 '활동하는'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는 성공했지만 믿음생활에서 실패해서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부자 청년이 어렸을 때부터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지만, 예수님 앞에서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된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1. '절대 타자(他者, Other)' 앞에 서기.
'타자'란 나와 전혀 다른 존재를 말합니다. '절대 타자'란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하나님을 일컫습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진 하나님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이나 생각 이상의 초월적인 분이기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경외심과 겸손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 타자(他者, Other) 앞에 서기.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시듯 '믿음'은 나와 다른 사람('타자')앞에 서게 합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입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눈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타자'는 믿음의 활력소입니다.

3. 타아(他我) 앞에 서기.
믿음으로 직면해야 할 또 다른 타자가 자기 자신입니다. 너무나 익숙하고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잘못된 자아인식 때문에 비극적인 경우가 생깁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기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이 알고있는 자신의 모습과 예수님이 보시는 모습은 분명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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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로 살아라

2019. 4. 28. 15:16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4. 28. 주일 오전예배

고린도전서 15:3-4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을 해석해 주면서 말쓰대로 부활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했음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않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부활을 어떻게 믿었고 어떤 모습의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구약의 대표적인 신앙인들을 통해 부활신앙의 실체를 살펴봅시다.

1. 아브라함의 부활신앙(히 11:17-19).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라는 하나님의 시허에서 '아들이냐? 하나님이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부활신앙이란 하나님만 붙잡으면 죽어도 죽는게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2. 모세의 부활신앙(눅 20:37-38).
죽은자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40년 동안 도망자로 광야에서 양치기하던 모세를 부르던 하나니의 음성을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으로 하나님 안에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이에 모세는 두려움과 패배감과 자기경험을 내려놓고 새롭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합니다.

3. 다윗의 부활신앙(행 2:24-28).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베드로는 시편 16편의 다윗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다윗은 고통과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희망에 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부활신앙이란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희망을 보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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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읽어라

2019. 4. 21. 15:1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4. 21.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24:44-49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엣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되새기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명되었고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했지만, 사람들은 밎지 않았습니다. 2000년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밎지 않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줄까요?

1. 예수 부활의 상황적 증거.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며칠 후에 즉시로 공식화되었고 편지형태로 전파되기 사작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의 구체적인 이름이 공공연하게 거론하며 증언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의 구체적인 이름이 공공연하게 거론하며 증언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뿐만 아니라 배척하던 사람들의 삶도 급격하게 변화되어 순교까지도 기꺼이 감당할 정도였습니다. 과연 거짓되고 꾸며낸 일에 자기의 생명을 걸었을까요?

2. 예수 부활의 성경적 증거.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주 제자에게 성경으로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켜주었고(눅 24:25-27),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면서 자신의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의 성경인 구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시 유대인들은 그렇게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몰랐을까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3. 예수 부활의 삶의 증거
구약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기록되어 있었다면, 다시 오실 예수님도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기준은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성경읽기나 내용에 대한 공부만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그 뜻을 이해하여 순종하는 삶이 부활의 증인이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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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일상으로

2019. 4. 14. 15:11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4. 14.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24:1-3


 

예수님의 무덤은 있지만, 그 속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흔적만 남은 그분의 무덤에 아무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저 빈 무덤일 뿐, 관심 밖의 일이 돼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찾기보다는 죽은 예수님을 찾고, 그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예배합니까? 살아나신 예수님을 예배합니까?

1. 무덤을 찾는 사람들.
유대인에게는 시체나 무덤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민19:16). 신성모독의 죄명을 쓰고 십자가형를 받은 예수님의 경우는 더욱 부정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은 무덤을 찾아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의 눈을 피해 장례의식을 행하려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은 자기만족을 위함이 아닐까요?

2. 무덤을 교회로 만드는 사람들.
중세시대에는 교회건물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 놓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시란 날 때면 언제든지 교회로 오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님을 위해 예물을 가져오면 복을 받는다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계신 곳에 같이 묻히는게 영광이라고 홍보했습니다. 이런 교회 모습은 예수님의 무덤이 아닐까요?

3. 무덤에서 일상으로 가신 예수.
죽으신 예수님은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의 길에(눅25:15), 제자들이 모인 방에(요20장), 고기잡이하는 갈릴리에(요21장), 갈릴리의 산에(마28:16), 예루살렘의 감람산에(행1장) 나타나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일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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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복음

2019. 4. 7. 15:22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4. 07.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26:2


 

'질서'가 다소의 개인적인 불편을 감수하면서 공공의 편리와 유익을 만드는 것처럼, 복음은 우리의 삶에서 불편을 감수케 하여 하나님 나라의 규범을 세웁니다. 복음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익숙한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복으으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불편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1. 복음은 우리의 일상을 불편하게 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많습니다. '낮아져라' '섬겨라' '용서하라' '회개하라' 등, 우리의 일상과는 다른 삶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를 기쁘게 하려고 어떤 불편도 감수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떤 희생이나 불편함도 개의치 않게 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당연한 변화입니다.

2. 복음은 우리의 관계를 불편하게 합니다.
복음으로 사는 삶은 모든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 등, 그동안 익숙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바뀌면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뀝니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생각들이 점점 불편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게 합니다.

3.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의 형상과 삶을 닮아가도록 끊임없이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결국 우리의 성품과 인격의 변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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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시작으로 만드는 복음

2019. 3. 31. 15:19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3. 31.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23:39-43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내용은 평소에는 아무렇게 살다가 죽기 바로 전에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마27:44)와 마가(막15:32)와는 달리 누가가 한 행악자의 이러한 변화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을 통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1. 가장 흉악한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로마시대에 십자가형을 받는 '강도' 또는 '행악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당시의 법으로는 중죄인으로 사형에 합당한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우리에게 천국 백성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2. 가장 비참한 상황을 가장 행복한 상황으로.
법치주의를 지향하던 로마는 피지배 국가에는 관대하게 대하지만 법을 어기면 가장 혹독한 처벌을 공개적으로 하기위해 만든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에서도 십자가형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신21:23).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장소로 바꿔집니다.

3. 가장 절망적인 시간을 영원한 시간으로.
예수님과 두 행악자는 가장 고통스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인생의 가장 마지막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한 행악자에게 주어진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절망적인 육신의 세계에서 영원한 세계로 옮겨줍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십자가 위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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