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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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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 시대의 '카이로스'

2019. 8. 11. 15:20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8. 11.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24:1-3

 

 

감람산에서 성전을 내려다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전이 무너지는 '때'와 세상 끝의 '징조'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24장과 25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복음서의 계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며 무슨 뜻일까요? '때'와 '징조'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하려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마태복음 24장과 25장 전체를 통해 생각해 봅시다.

1.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의 내용(24:3절, 24:4-31절)
제자들은 '때(크로노스)'와 '징조(세메이온)'에 대해 질문합니다(3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때'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라고 하고(24:36, 42, 25:13), '징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날짜(크로노스)'보다는 '징조'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2. 예수님의 비유의 내용(24:32-25:46)
이러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6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6가지 비유의 상황은 다 다르지만, 공통점은 비유 속의 주인, 신랑, 임금 등이 예고없이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찾아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에 와서 결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시간은?

3.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
결론적으로 '종말의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건 매 순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카이로스'의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 속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카이로스'적인 삶의 대표적인 것이 예배와 기도입니다. 교회의 공적인 예배와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 속의 '카이로스'가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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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간

2019. 8. 4. 15:05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8. 04. 주일 오전예배

에베소서 5:15-17

 

 

성경에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물리적 시간)'이 구별되어 있습니다(참고, 창1:5과 창1:14).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시간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시간개념을 분명히 구분하여 인간의 시간을 '크로노스', 하나님의 시간을 '카이로스'로 표현합니다. 성도들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어떤 모습일까요?

1. 세월을 아끼라
오늘 본문은 16절을 중심으로 15절과 17절이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입니다. '지혜있는 자'(15절)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17절)'가 강조하는 것은 가운데 있는 15절의 '세월을 아끼라'입니다. '세월(카이로스)'과 '때가(헤메라=크로노스)' 댓구를 이루고, '아끼라(엑사고라조)'와 '악하니라(포네로스)'가 댓구를 이루는 구조입니다.

2. 하나님의 시간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로서 물리적인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입니다(참고, 출3:14). 하나님의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호숫물처럼 고여있어 그 물을 떠낼 때 나의 것이 되는 것처럼 '카이로스'는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시간으로, '지금' ,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만들어집니다.

3. 하나님의 시간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아끼다'는 말은 '엑사고라조'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구속하다' '지불하하고 사다' '게으르지 않다'입니다. 시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듯이, '인간의 시간'을 사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흐르는 '인간의 시간' 속에 그냥 두면 악한 용도로 사용되지만, 하나님과 함께 '카이로스'로 만들어버리면 영원(함고, 요17:3)을 소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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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복 받읍시다

2019. 7. 28. 15:06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7. 28.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28:1-6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받고 싶은 것이 바로 '복'일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복일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모르면 기복적이고 무속적인 신앙으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뻐하는 복을 사모하며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모든 성도에게 주시로 한 복은 무엇일까요?

1.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복'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2절: '베라카')은 동사 '바라크'에서 나온 단어로 '무릎을 꿇다' '찬송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복입니다. 따라서 복이란 모든 범사에서(3-6절의 내용)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굴복하여 순종하며 찬송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2. '행복'이란 하나님의 복을 깨닫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33:29절의 '행복(히: 에쉐르)'은 '아쉐르(바르게 가다, 전진하다)'의 명사형으로 성경적인 복('바라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번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행복입니다(참고, 시편1편).

3.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복도 같은 의미일까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도 세상적인 번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마5:1-10). 바울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고 인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복이 임하였음을 말하고(빌2:10-11), 예수님 안의 모든 신령한 복은 결국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엡1:3-14).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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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사로잡힌 사람

2019. 7. 21. 14:55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7. 21.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9:28-33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된 사건은 저자는 물론 초대교인들에게 그만큼 큰 감동을 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변화산의 기억 또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세 복음서에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기도의 능력이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증명하기 위함일까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등장이 우리의 신앙에 주는 도전을 알아봅시다.

1.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 같은 선지자'를 세우겠다고 하셨고(신18:15), 제자들은 예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임을 증명합니다(행3:22-24, 7:37). 그리고 엘리야가 선지자들의 대표격이라고 보면 변화산에 등장한 세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입니다. 이 선지자들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 이 세사람이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모세는 40년의 광야 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합니다(신34:6).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고난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참고, 눅9:22-27).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에 도취하기보다는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에 집중합니다(말4:5-6).

3.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배경은 베드로가 신앙고백 한 후 예수님이 고난에 관한 말씀을 한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눅9:18-27).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에 감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하늘의 사라들은 이 세상의 무관심이나 상황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데 집중하기에 세상 사람들의 평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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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버리고 하늘을 취하라

2019. 7. 14. 14:53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7. 14.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18:15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는 백성들에게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내주실 때 그의 말을 잘 들으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가나안 땅이 광야 여정의 목적이 아니라 더 크고 의미있는 목적이 있기에 하나님은 또 다른 선지자를 보내주실 거란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이고, 그 선지자가 추구할 목적은 무엇일까요?

1.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선지자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많은 선지자가 역사에 등장했지만, 신약시대까지 '그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줍니다(요1:21).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 선지자'임을 고백하고(요6:14), 베드로의 설교(행3:22-24), 스데반의 설교(행7:37)에서 예수님이 그 선지자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 선지자임을 은연중에 입증하셨습니다(눅9:28-31, 35절).

2. 왜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레위지파 출신인 모세는 바로 전에 레위지파에 주어진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했습니다(1-8절). 그런데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바 있습니다(창49:5-7). 모세는 저주받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신33:8-10).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헌신의 삶 때문입니다(출32:26-29, 민25:5-7).

3.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는 것은 그 땅이 주는 '특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얻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레위지파처럼 땅을 버리고 하늘을 소유하는 복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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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가나안은 없다.

2019. 7. 7. 13:41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7. 07.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11:8-12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지상낙원' '축복의 땅' '기회의 땅'이라는 의미일까요? 지금도 이스라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연환경적으로 사람이 거주하기에 좋은 여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나안은 어떤 의미의 땅이며, 신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땅일까요?

1. 전쟁해야 할 땅입니다(8절).
'차지할 땅'이란 이미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싸워서 빼앗아야 할 땅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은 공짜가 아니라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세워지는 땅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곳이 아니라 영적전쟁의 피빌린내(?) 나는 곳입니다.

2. 하나님만 의지해야 살 수 있는 땅입니다(10-11절).
400여년을 살아서 익숙한 애굽과(10절) 가나안(11절)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사과 골짜기가 있어 비를 흡수하는 땅이기에 애굽이 훨씬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땅입니다(12절).
'돌보다(히: 다라쉬 = 찾다, 구하다, 간구하다)'는 보살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의 눈'과 합쳐져서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한 사람을 찾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내 계획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곳입니다.

4. 내가 만들어가야 할 땅입니다(8절, 참고:13절).
가나안에는 '모든 명령을 지켜라'(8절), '하나님을 섬기면'(13절)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이는 인간의 타락으로 자연계에 저주가 온 것을(창3:18-1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저주를 끊어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복(롬8:19-22)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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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이 기도하는 집

2019. 6. 30. 15:1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30. 주일 오전예배

이사야 56:7

 

 

이사야 56장의 내용은 장차 회복될 유다의 신앙을 예언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제사하는 내 집'이라 하지 않고 '기도하는 내 집'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능이 무엇읹디 살펴봅시다.

1.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입니다. 제사의 기능도 '기도'와 같이 죄로 인해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의미하는 '기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위한 방편입니다.

2.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타락한 유다를 심판하고 새롭게 세워질 성전의 모습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율법처럼 종교적 행위가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행하는 것이 우선하는 공동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마음을 헤아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3. 기도는 우리 자신들이 성전 도는 것입니다.
'만민(All Nations)'이란 인종과 혈통과 관계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참고, 고전3:16, 엡2:20-22). 우리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성전도 마찬가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기에 성도 각자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그 뜻을 이루어가는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1일 기도회는 문제해결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성전 삼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신앙 회복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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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오물과 쓰레기

2019. 6. 23.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23. 주일 오전예배

고린도전서 4:6-13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정작 세상적인 풍요와 화려함을 맛보면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공과 권세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같은 축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 후서를 통해 '자랑'이란 단어를 40회 이상 사용하면서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진정한 자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랑을 하고 싶으십니까?

1. 성도들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9-13절)
고린도 교인들은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지적이고, 영적인 은사도 충만하였지만, 오히려 이런 것들을 자랑하다가 여러 분란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에게 전하는 바울 자신의 삶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구경거리요(9절), 세상의 오물과 쓰레기(13절) 같이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한 고난의 삶입니다.

2.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4절)
세상에서 성공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공이 주는 기쁨보다는 잃업저리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은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정도로 훌륭한 성품을 가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복음으로 사는 삶은 고난과 박해가 있을지라도 기쁨과 감사의 삶이 됩니다(참고, 고후4:7-11). 믿음의 고난이 복음을 빛나게 합니다.

3.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비록 환경과 형편은 불신자들에게는 조롱과 비웃음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의미와 자랑은 그러한 삶 속에서도 복음으로 사는 삶의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참고, 고전4:15-16절).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형편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그러한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일부분임을 자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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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믿음

2019. 6. 16. 15:2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16. 주일 오전예배

사무엘상 26:7-12

 

 

'도덕적 믿음'은 그 개념에서 서로 상충하는 듯하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믿음'이라면 믿음을 담는 개인적인 그릇이 '인격'이고 인격이 사회성을 가질 때 '도덕'이라고 하고, 도덕이 체계화된 것이 '윤리'입니다. 따라서 도덕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반드시 도덕적인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그릇을 크게 키우길 원합니다.

1. 도덕적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도덕에서 '도'란 삶의 바른 기준을 의미하고, '덕'이란 이런 기준에 합당한 구체적인 삶의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기준이며 그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행위가 바로 도덕적인 믿음이요 삶이란 의미입니다. 이런 삶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연단'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더덕성을 바꾸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2. 도덕적 믿음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에 합당한 도덕, 윤리적 삶을 '덕'이라 하고, 그러한 도덕적인 삶을 '덕을 세운다'(롬15:2)고 표현입니다. 이 표현에는 '오이코도메'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본래의 뜻은 '집을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집을 짓듯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삶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구체적인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3. 도덕적 믿음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인식의 변화입니다.
다윗이 연단을 통해 자신의 본질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다윗은 여전히 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훈련과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으며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인식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원수인 사울ㅇ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섬기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사울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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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삽시다

2019. 6. 9. 12:38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09. 주일 오전예배

사사기 6:11-14

 

'믿음으로 행하라' '믿음으로 살아라' '믿음이 좋다?' '믿음이 안 자란다' 등의 표현은 어떤 신앙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믿음이며, 믿음이 좋고 나쁜 것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걸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기드온을 통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부족하고 결점이 많은 기드온이지만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큰 용사'라고 불립니다. 이는 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 너의 힘으로'(14절)는 기드온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사용하는 용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크고 작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생겨야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택을 하다 보면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믿음의 선택을 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3.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현실을 불평하고(13절), 확신이 없어 표징을 요구하고(17절),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해야 이해하는(삿7:13-15) 연약한 사람이지만,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기도 쉽겠지만, 작은 것에 순종하다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순종에는 핑계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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