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소망지기

태그목록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주일예배 말씀'에 해당되는 글 712

  1. 2019.10.20 에클레시아의 삶
  2. 2019.10.13 에클레시아의 위기
  3. 2019.10.06 에클레시아의 경제학
  4. 2019.09.29 에클레시아의 능력
  5. 2019.09.22 나는 에클레시아다
  6. 2019.09.15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7. 2019.09.08 에클레시아
  8. 2019.09.01 예수님 맞짱뜨시다!
  9. 2019.08.25 앞뒤가 똑같은 요나
  10. 2019.08.18 주식회사 바벨론

에클레시아의 삶

2019. 10. 20. 15:03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0. 20.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디모데후서 4:6-8

 

 

초기 에클레시아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에클레시아의 많은 교회들은 이름없는 수많은 성도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숫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믿음의 길을 걸어간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지나온 신앙여정을 회고하는 사도 바울의 회상을 통해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 헌신된 삶.
디모데에게 신앙적 교훈을 하다가 6-8절에는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주어가 '내가', '나는'으로 바뀌면서 자신의 헌신된 삶을 '싸우고' '마치고' '지켰으니'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바울 뿐만 아니라 초기 성도들의 일반적인 모습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나라를 세웠습니다.1

2. 하나님의 사명으로 사는 삶
'달려갈 길'이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오직 한 길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하나님의 사명으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세례요한의 삶도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끝났음을 말씀하고 있듯이(참고, 행13:25), 에클레시아의 삶은 세상적인 삶보다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더 가치있고 의미있게 여겼습니다.

3. 하늘 소망으로 사는 삶.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있지만 하늘 소망으로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만의 소망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소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또 다른 믿는 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 에클레시아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클레시아의 길  (0) 2019.10.27
에클레시아의 위기  (0) 2019.10.13
에클레시아의 경제학  (0) 2019.10.06

에클레시아의 위기

2019. 10. 13. 15:03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0. 13.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6:1-7

 

 

초기 에클레시아는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주변의 위협과 박해를 무릅쓰고 오직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가정에서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교회 내부적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서 발생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교회가 직면한 문제해결의 원리를 생각해 봅시다.

1. 에클레시아의 위기는 항상 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위기'라는 것을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교회의 평안'을 더 위험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을 날마다 행하는 영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곳에는 항상 내외적인 위기와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위기를 직면하는 공동체입니다.

2. 에클레시아의 위기는 복음에 집중하는 기회입니다.
최초로 발생한 교회의 '내적 문제'(1절)를 해결하기 위해 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 말씀, 사역'(2절, 4절)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사실 교회의 위기는 일어난 문제보다 그 문제 때문에 복음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클레시아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복음전파의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3. 에클레시아의 위기는 결국 은혜의 통로입니다.
에클레시아에서 발생한 위기는 결국 교회의 부흥을 이루는 원인이 되었습니다(7절). 초기 에클레시아는 편안한 환경 속에서 세워지고 성장한 것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위기 속에서도 기도와 말씀만 붙잡을 수 있다면 그 상황은 곧 하나님이 ㅈ시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클레시아의 삶  (0) 2019.10.20
에클레시아의 경제학  (0) 2019.10.06
에클레시아의 능력  (0) 2019.09.29

에클레시아의 경제학

2019. 10. 6. 15:10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0. 06.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2:43-47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반 가정에서 '에클레시아'로 모였습니다. AD 300년까지는 독립된 건물을 세우지 않았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면 상당한 기간동안 가정교회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어떻게 오랜 기간 동안을 '가정'에서 모든 신앙행위를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경제(Economic)'라는 단어는 '오이코스(집)'와 '노모스(법, 규칙)'의 합성어로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에클레시아의 경제는 무엇일까요?

1. 공유경제(44절).
공유경제란 소수의 사람에 의해 주도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자발적인 참여로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는 경제관입니다. 소유경제는 자본주의를, 분배경제는 사회주의를, 공유경제는 성경적 공동체를 만드는 기틀입니다. 창조의 원리도(창1:28) 소유나 이윤의 극대화라기 보다는 모든 자원을 함께 공유하는 원리입니다.

2. 자족경제(45절).
'자족'이란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최선의 수고에 대한 결과를 수긍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참고, 빌4:11-13). 따라서 초기 에클레시아는 박해의 어려운 상황에서 각자 최선의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고 그 결과에 만족하는 공동체입니다(참고, 행5:41). 받은 은혜에 대한 믿음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공동체였습니다.

3. 본보기경제(46절).
가정에서 에클레시아로 모이다 보니 가정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모범을 보임으로 가정의 가치를 지켜나가듯, 에클레시아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 그 자격을 가정에서의 삶을 중요한 자격요건으로 삼았습니다(참고, 행6:3, 딤전3장). 이는 에클레시아에서도 가르침뿐만아니라, 삶의 영향력도 그만큼 크다는 의미입니다.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클레시아의 위기  (0) 2019.10.13
에클레시아의 능력  (0) 2019.09.29
나는 에클레시아다  (0) 2019.09.22

에클레시아의 능력

2019. 9. 29. 14:56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9. 29.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1:1-7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그 규모나 인적구성이나 사회적 평가에서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부흥과 세계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기 에클레시아와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생활을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절대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1. 복음
에클레시아에서 결정된 사항은 좋든 싫든 모든 공동체가 따라야 할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에 따라 행동했을 때 그 결과가 좋은 것이면 '복된 소식(복음=유앙켈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진정한 복음이며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임을 전하였습니다. 이 복음은 공동체에서나 개인적으로나 모든 사람과 장소에서 담대히 선포되었습니다.

2. 성령
4절의 '성결의 영'이란 성령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의 신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보증입니다. 따라서 초기 에클레시아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한다는 것은 성령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일부 잘못된 성령사역자들에 의해 외곡된 성령의 역사를 바르게 회복해야 합니다.

3. 사람
초기 에클레시아는 로마시대의 신분계급이나 사회계층을 떠나 믿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여자들(롬16장), 종과상전(딤전6:2), 범되자(몬1:16) 등이 차별없이 동일한 형제자매로 인정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는 '믿는 사람'이 대상이자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클레시아의 경제학  (0) 2019.10.06
나는 에클레시아다  (0) 2019.09.22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0) 2019.09.15

나는 에클레시아다

2019. 9. 22. 14:5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9. 22.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9:10-19

 

'에클레시아'란 로마시대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정치적, 사회적 모임을 일컫는 말입니다(참고, 행19:39, 41). 이런 세속적인 용어를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공동체의 이름인 동시에 이 신앙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참고, 고전 1:2).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를 통해 개인적인에클레시아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교인'들의 모습과 비교해 봅시다.

1. 아나니아의 코뮤니타스
'코뮤니타스'란 '소통', '교제', '공동체'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나니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가려는 원수와 같은 사울을 향해 '형제 사울아'하며 예수님의 뜻을 이룹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도 깊은 영적 친밀함으로 교제하고 있습니다.

2. 아나니아의 이뮤니타스
'이뮤니타스'란 세상의 유혹이나 방해에 대한 면역과 내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내용은 아나니아가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에 대한 예수님의 계획(11-12절, 15-16절)을 듣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모든 미혹과 방해를 극복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3. 아나니아의 미니스트라리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났듯이 직접 사울의 눈을 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나니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계획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편견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헌신의 삶이 곧 '섬김'입니다. 그래서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클레시아의 능력  (0) 2019.09.29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0) 2019.09.15
에클레시아  (0) 2019.09.08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2019. 9. 15.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9. 15.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창세기 39:1-6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에클레시아다  (0) 2019.09.22
에클레시아  (0) 2019.09.08
예수님 맞짱뜨시다!  (0) 2019.09.01

에클레시아

2019. 9. 8. 13:41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9. 08.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요한일서 1:1-4

 

다니엘과 요나, 그리고 지난 중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신자들은 전통적인 유대인 신앙공동체와는 전혀 다르게 각 사람들의 가정에서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리스 도시국가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정치적, 사회적 용어입니다. 이 용어를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코뮤니타스(Communitas)
그리스 도시국가의 에클레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른 의사결정을 위한 소통과 결정된 사항에 대한 빠른 실행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예수 신앙을 서로 공유하고, 이 복음을 더 많은 불신자에게 전하기 위해 가정단위의 에클레시아에서 말씀, 예배, 기도, 교제 등을 통한 하나님과 소통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2. 이뮤니타스(Immunitas)
'Immune'이란 단어가 '면역'이란 의미이듯,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클레시아'를 통해 세상의 미혹에 휩쓸리지 않고 이단사상이나 타종교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확고한 신앙훈련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복음과 확고한 신앙관으로 무장하는데 게으르지 않고 '훈련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3. 미니스트라리(Ministrari)
'섬김'의 사역입니다. 다른 신앙공동체와는 달리 예수님도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듯이(마20:28),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클레시아'에서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서로 섬기는 사역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려 했습니다. 여러가지 직분과 은사적 사역이 구분되어 있었지만 기능적 차이뿐 그 목적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데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성경적인 '에클레시아'의 모습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0) 2019.09.15
예수님 맞짱뜨시다!  (0) 2019.09.01
앞뒤가 똑같은 요나  (0) 2019.08.25

예수님 맞짱뜨시다!

2019. 9. 1. 12:41 | Posted by 소망지기

 

2019.09. 01.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누가복음 7:48-50

 

 

바벨론에서의 다니엘과 니느웨에서의 요나를 통해 올바른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셨을까요? 단순히 천국 복음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득권자들이 가진 신앙관과 가치관과 부딪치면서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입니다.

1. 종교적, 사회적 관습과 싸우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여성의 사회적 평가는 아주 낮았습니다. 남자들과 함께 식사도 할 수없었고, 사람의 수에도 들지 못하고, 법정에서 증인의 자격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죄인'인 여자는 더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종교적,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고 '죄인 여인'의 헌신을 기꺼이 받고 죄사함을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 기준들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라면 기꺼이 벗어버려야 합니다.

2. 세상을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죄사함은 성전에서 제사장에 의해 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행하는 죄사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으로 자신들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종교적 관습과 상관없이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성전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도 예수님으로 인한 '믿음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3. 종교적 의무를 사랑을 바꾸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을 이용하여 '죄인'을 만들어 정죄놀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여 의무와 순종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에 의한 '자발적 순종'을 보시고 죄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율법 자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준행하는 것이지만 변질된 율법주의는 이런 사랑보다는 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앙은 '죄사함의 방법' 보다는 '죄사함의 열매'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클레시아  (0) 2019.09.08
앞뒤가 똑같은 요나  (0) 2019.08.25
주식회사 바벨론  (0) 2019.08.18

앞뒤가 똑같은 요나

2019. 8. 25. 15:23 | Posted by 소망지기

 

2019.08. 25.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요나 4:1-4

 

 

요나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불순종으로 시작해서 불평을 끝을 맺는 좀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불순종하다가 주일 학교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구원을 받고 이방 도시인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하게 되었다면 전과 후에 어떤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 할 터인데 전혀 으겋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기 전과 후가 똑같은 요나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1. 고정관념ㄴ에 물든 요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니느위는 자신의 고국을 괴롭히는 이방나라이기 때문에 불순조하고 도망갑니다, 나중에 어쩔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주 싫어합니다(4:1). 이런 못습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가르핌보다는 자기 생각과 신념에 사로잡혀 온전한 믿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실용성에 물든 요나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해 교훈하십니다. 요나가 니느웨보다 박넝쿨을 더 '아낀'(히:'후쓰 = 동정하다, 불쌍히 여기다) 이유는 자신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용성에 물들어 버리면 '이용'하는 것은 잘하지만 '헌힌'ㅎ에는 소극적으로 됩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에만 순종과 헌신을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성품과는 전혀 다른 겁입니다.

3.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런 요나는 바발론에서 고위관리를 지낸 다니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정치적, 사회적, 관습적으로 싫어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다니엘이 매국노가 아닌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기 떄문이듯, 자신이나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히기ㅏ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순종하는 성돋ㄹ이 되어야 합니더.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 맞짱뜨시다!  (0) 2019.09.01
주식회사 바벨론  (0) 2019.08.18
'크로노스' 시대의 '카이로스'  (0) 2019.08.11

주식회사 바벨론

2019. 8. 18. 13:1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08. 18.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다니엘 2:17-23

제목 : 주식회사 바벨론

'주일예배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앞뒤가 똑같은 요나  (0) 2019.08.25
'크로노스' 시대의 '카이로스'  (0) 2019.08.11
하나님의 시간  (0) 2019.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