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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3)

2021. 9. 19. 12:48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9. 19.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33:23-28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3)

우리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이 고난 속엥서 형통함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모든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가진 잘못된 믿음(의)과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의)을 비교하면서 욥으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됐는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신앙도 함께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1. '의'란 무엇인가?
'의(히:쩨테크)'란 '바르다'. '옳다', '공평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크게 두가지로 사용되는데 공동체 안에서 도덕적 관습적 가치를 따르는 행위를 지칭하거나, 신앙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의'의 주체가 사람이고 근거가 공동체의 가치관에 기원하면 '도덕적 의', 하나님에게 기원하면 '구원사적 의'라고 합니다.

2. 욥이 가진 의.
엘리후가 진단하는 욥의 문제는 '신앙문제'입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욥 32:1)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욥이 주장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와 다름을 설명해 나갑니다. 욥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예배드린 행위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도덕적, 관습적 의'에 불과하다며 일축합니다.

3.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비유를 들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당사자의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대속물'을 통하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에 있습니다(24절). 하나님의 의에는 인간의 어떤 수고나 노력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친밀'해진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뻐할 때 공의(의:'째테크')가 회복되게 됩니다(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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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2)

2021. 9. 12. 12:47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9. 12.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33:13-18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2)

예기치 못한 삶의 환난이 닥쳐오면 혼란과 두려움이 휩싸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사건 자체에 있기보다는 당사자인 우리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평온할 때 정성껏 예배드리는 삶만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한결핟은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믿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욥에게 있는 문제는?
엘리후가 지적하는 욥의 문제는 자신은 깨끗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준것에 불평하고 있습니다(33:8-11절, 34:5-6). 그 결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라고 합니다(34:9, 35:3). 욥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신의 상황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욥에게 엘리후가 전하는 참된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2.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말씀합니다(13-14절).
욥은 자기자신에게만 집중하다보니 하나님의 의도에는 무심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의 크기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형편을 '알리는데'는 열심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서툰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3. 하나님은 고난도 도구로 사용합니다(15-18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왜(why)'라고 하면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이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what)'라고 한다면 항상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영광받기 위해 자신을 시험했음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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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1)

2021. 9. 5. 12:42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9.05. 주일오전예배
본문: 욥기 32:11-16
제목: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1)

 

 

욥기는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책입니다. 그러나 욕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욕기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엘리후입니다. 삶의 문제 앞에서 시음하는 욥이나 이를 바라보며 권면하고 있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믿는 하나님과 엘리후가 믿는 하나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1. 치구들이 믿는 하나님.
고난 중에 있는 욥을 찾아와 권면하는 엘리바스가 믿는 하나님은 심으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하나님입니다(욥4:7-8). 빌닷이 믿는 하나님은 역사와 전통을 통해 경험된 하나님입니다(요8:8-10). 소발이 믿는 하나님은 철저한 계명에 따라 복도 주고 심판도 하는 교리적이고 원칙주의적인 하나님입니다(욥11:13-19).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주장을 옳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욥42:7-9).

2. 욥이 믿는 하나님.
욥기 1장에서 보여주는 욥의 신앙은 하나님이 인정할 정도로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1:8, 2:3). 그러나 욥이 고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바른 신앙으로 살았는데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욥을 향해 '생각을 어둡게 하는자(38:2)', '하나님을 탓하는자(40:2)'라고 불렀습니다.

3. 엘리후가 믿는 하나님.
엘리후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중에 발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현실문제를 해석하기에 급급했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집중합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논리'나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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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29. 12:44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8. 29. 주일오전예배
본문: 빌립보서 2:5-11
제목: 성도 안에 있는 불신앙

 

 

참신앙이냐 불신앙이냐의 기준은 하나님과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적인 신앙만이 참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이 비록 성경에서 말하는 모습을 갖추지 못해 아직은 부족하고 연약한 상태라면 이것 역시 '불신앙'입니다. 신앙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중심으로 쳥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성도라면 어떤 신앙으로 성장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의 삶을 통해 알아봅시다.

1. 마음이 아니라 성품입니다(5절).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적 또는 감정적인 동감의 느낌이 은혜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이어받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내야 합니다(참고, 벧후1:4). 그래서 우리를 예수의 성품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고난을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2. 채움이 아니라 비움입니다(6-8절)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위해 많은 것을 비우셨고, 비움의 결과는 고난과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비움을 경험케하는 것은 결핍과 약함을 통해 전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하여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임하는 고난의 시간은 예수님의 성품과 마음을 펼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3. 자기만족이 아닌 영향력입니다(9-11절).
신앙은 자기만 예수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인한 '영향력'이 생겨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신앙이 전염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력이 없는 신앙은 곧 불신앙이요 가짜신앙입니다. 참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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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22. 12:41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8. 22. 주일 오전 예배
본문: 누가복음 10:17-20
제목: 전도자 안에 있는 불신앙

모든 믿는 자들이 공통으로 받은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특별한 사역자나 은사자의 전유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가진 전도의 개념과 우리가 가진 전도의 개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발견하고 바른 전도자의 신앙으로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 하고, 그러나 큰 영적인 의미가 있는 특별한 사역입니다.

1. 전도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17절).
전도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전도'와 '가르침'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이나(마9:35) 제자들의 사역(행5:42)을 보면 전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가르침은 말씀을 이해시켜 믿음을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믿는자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바른 가르침의 은사가 있다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2. 전도는 영적 전쟁입니다(18-19절).
칠십 인들은 전도사역을 통해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기뻐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전도는 한 사람의 교인을 더 늘리는 차원이 아니라, 사탄의 지배와 매임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통하여 영적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고, 육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사탄을 제압하고 승리를 맛보는 일입니다.

3. 전도는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20절).
전도는 전도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도하는 사람에게도 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리자요(16절). 전도는 생명책에 전도자의 이름이 기록되는 의미있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20절). 전도자는 사탄을 상대로 하는 영적 전쟁의 승리자이기에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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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15. 12:49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8.15.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8:4-7
제목 : 직분자 안에 있는 불신앙

직분은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불려지는 호칭도 아니고, 충성스럽게 교회 기관을 섬기는 봉사자의 의미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세운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가 행하는 구제 사역을 위해 세워진 일곱 집사(참고, 행6:1-4)중에서 스데반과 빌립이 보여주는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직분자들이 깨닫고 본받아야 할 귀한 교훈입니다. 성경적인 직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일이 아닌 하나님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 안에 있는 직책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하나님의 일꾼들이 직분자입니다. 이런 직분자의 특징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특정한 일을 위해 세웠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분자들은 항상 주어진 일보다는 일을 주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받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구제사역을 위해 세워진 빌립은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 사마리아로(5절), 광야로(26절) 흩어져야 했지만 불평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합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받는 일꾼이기에 환경의 변화나 사역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3. 복음전파를 위해 세워진 사람입니다.
직분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 교회나 목회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주어진 봉사의 일을 통해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자는 자신이 가진 직분이나 주어진 일을 잘 행함으로 인한 보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의 뜻을 행하고 예수님을 전한 것으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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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8. 12:41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8.08.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무엘상 13:8-14
제목 : 예배자 안에 있는 불신앙

코로나19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예배에서 비대면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하면서 자칫 소홀해지거나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각자의 예배생활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앞서 드린 제사 속에 들어있는 불신앙적인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람중심의 예배(11절).
스스로 제사지낸 이유를 묻는 사무엘에게 대답하는 11절을 보면 "백성은... 당신은... 불레셋 사람은..."이라며 예배의 이유를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여 예배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람보다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하나님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자기 목적을 위한 예배(12절).
12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블레셋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도움을 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사울이 드린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케 합니다. 예배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예배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드리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3. 타성에 사로잡신 예배(13-14절).
사울왕에게 임한 저주는 사무엘이 인도해야 할 제사를 자신이 직접 드렸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진노한 이유를 14절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사울의 행위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후에 "내 마음에 맞는 사람"(행13:22)인 다윗을 세우는 것을 보면 예배는 형식이 아닌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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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1. 12:44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8.01. 주일오전예배
본문 : 누가복음 5:15-16
제목 : 기도자 안에 있는 불신앙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많은 이적과 기적을 통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따르며 인기(?)와 명성(?)을 쌓고 있습니다. 특별한 은혜나 능력을 필요치 않은 예수님이 틈틈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기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평소 우리가 열심히 드리는 기도에 대한 또다른 모습을 예수님의 기도에서 찾아보면서 바른 기도의 영성을 회복합시다.

1.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
예수님은 스스로가 하나님이시기에 기도를 통해 특별한 능력을 공급받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틈날 때마다 기도하셨을까요? 기도는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고, 이런 관계속에서 여러가지 문제해결을 위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방언으로는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창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이 회복됨을 보여주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로써 외국어로 말씀을 전함으로 인해 통역을 필요로 하는 방언(고전14장)과 외국어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기도(행2:3-4)를 분명히 구분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일을 통해 구한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는 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7. 25. 11:00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7.25.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한복음 14:6-7
제목 : 믿는 자 안에 있는 불신앙

요한복음 14장은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한 내용입니다. 곧 드러날 유다의 배신(요13:21)과 베드로의 부인(요13:38),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이해가 전혀 안되는 도마(5절)와 빌립(8절)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는 불신앙에 대한 지적이자 불신앙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불신앙이 있을까요?

1. 길 = 어떻게 살것인가?
'길'은 광야나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아시스로 연결해주는 생명길로서, 인생의 방향과 삶의 방법에 대한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수 많은 삶의 모양과 방법이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이 가장 의미있고 복된 길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정작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기 삶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바로 불신앙입니다.

2. 진리 =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진리'는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로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시대마다, 사람마다 그 추구하는 바가 다른데, 철학, 경제, 사회, 자기성취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너희 삶의 의미다'는 것입니다. 믿음안에 있다면서도 만족함이 없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3. 생명 =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생명'은 영적과 육적인 것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어떻게 먹고 살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어떻게 구원받을까' 등에 대한 대답이 '예수가 참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는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위기나 문제 앞에서도 예수님을 구하고 찾고 바라는 것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2021. 07. 18.  주일오전예배

본문 :  벧후 2:20-22

 

제목 : 성도들에게 주는 경고

 

베드로전서는 고난의 문제를 다룬다면, 베드로후서는 고난 속에 나타나게되는 여러가지 미혹과 그 분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하더라도 길어지는 상황 속에서 자칫 영적으로 나태해지거나 무감각해져서 진리에 대한 기준이 무너지면서 변질되고 타락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귀기의 때르 살아가는 성도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할 신앙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믿는 자도 미혹될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나 21절에서 '의의 도를 안 후에'라는 것은 은혜받고 하나님ㄴ을 잘 믿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길어지는 위기 속에서 다시 타락하여 옛 살믕로 전락하는 일들이 일어남을 알려줍니다. 성도들에게 삶의 위기는 곧 영적 위기일 수 있기에 더욱 경계하여 거직된 신앙에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미혹에 얽매이면 집니다.
20절의 '얽매이다;'라는 의미는 '섞이다'는 뜻입니다. 조금씩 마음과 생각으로 통해 미혹이 들어와 섞이게 되면 결국 미혹에 져서 그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5절에서 소개하는 발람의 경우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적당하게 타협하고 용납하면 결국에는 그로 인해 올무가 되어 망하게 됩니다. 작은 유혹도 조심해야 합니다.

3. 바른 신앙을 굳건하게 지켜야 합니다.
신앙인이 다시 타락하면 그 결과는 더 참혹함을 말합니다. 그 상태를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인 '개' '돼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다시 옛 상태로 되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위기 속에서도 늘 깨어서 말씀과 예배,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신앙의 관계를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삶의 위기는 영적각성의 경고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