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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 계획

2023. 1. 29.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1.29.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9:6-24
제목 : 하나님의 구원 계획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여러 가지 특별한 은혜를 베풀며 인도하셨는데 결과적으로는 예수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의도하심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런 의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인가?'(6절).
현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효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들'에 대한 것이기에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하심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신실하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 구원입니다.

2.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가?'(14절).
하나님이 전적으로 선택을 결정한다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는 모세와 바로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그들의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이 결정된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모세에게는 은혜를, 완악함을 택한 바로는 그대로 됨을 확인해 줍니다.

3. '왜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는가?'(19절).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인데 왜 우리를 책망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에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여러가지 종류의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고, 또한 잘못 사용하여 '진노의 그릇'과 잘 사용한 '긍휼의 그릇'에 대해 판단할 권한이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책망은 결국은 우리가 인생을 잘못 산 것에 대한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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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중에 만난 성령

2023. 1. 22. 12:11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1.22.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8:1-2
제목 : 절망 중에 만난 성령

 

 

성경 66권의 요약이 로마서라고 하고, 로마서의 핵심이 8장에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절망 중에 고통하는 성도들에게 분명하고도 명확한 해결의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낙심할 때 다시 일어나 성화의 삶을 힘차게 달리레 하는 하나님의 성령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1.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받고 성화의 삶을 살게 하는 복음이 있음에도 여전히 죄의 문제로 절망하는 7장의 상황을 말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실제 삶에는 여전히 죄인으로 사는 상황을 말합니다.

2. '스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죄성으로 인해 죄의 종노릇하기도 하지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으로 죄와 상관없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성화를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비록 여전히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예수 안에 살아가려고 애쓰다 보면, 예수 안에 여전히 죄인인 나의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가 있는데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의 뜻으로 살게 하는 '돕는 배필'('에쩨르' '파라클레토스')입니다.

4. '정죄함이 없나니'
죄가 율법으로 우리를 정죄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도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죄책감이나 아픔 기억으로부터 자유케하여 성령과 함께 생활하게 합니다. 회개는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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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았습니까?

2023. 1. 15. 12:33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1.15.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6:3-11
제목 :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이라고 하면 죽어서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신앙생활이 건강하게 세워지지 못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왕으로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으로 인해 우리의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그 효과가 분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구원받은 어떤 모습닐까요?

1.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3-5절).
칭의를 통한 구원의 모습을 '세례'의 의미와 연결해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세례가 의미하듯, 죄에 대하여는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가는 천국행 티켓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백성 또는 자녀로 살아가는 실질적인 생활입니다.

2.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6-9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구원시키신다'는 촥증이 아니라, 왕이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참고, 마6:33, 고후5:15). 와의 명령에 순종하면 왕은 그 백성을 보호하고 바르게 인도하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푼 것은 '이제부터 나를 위해 살아라'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3. 이 땅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10-11절).
구원은 새롭게 변화된 삶을 요구합니다(참고, 4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자"(11절)로 여기라는 것은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곧 '거룩'입니다(참고, 롬6:1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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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벗어라

2023. 1. 8. 12:3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1.08.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2:17-29
제목 : 가면을 벗어라

 

 

로마 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소문날 정도였지만(참고, 1:8), 복음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이런 교회에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은 자기 상태를 알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모르면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있기에 굳이 복음이란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인들의 상태를 X-ray,  초음파, MRI 등으로 찍어서 적나라하게 들춰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1.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할례는 하나님 백성의 징표로서 초대교회 시기에는 '유대인이다'라는 상징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이고 육체적인 할례보다는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고백과 실천이 더 중요하듯, 기독교인에게도 '교회출석', '예배참석' 등의 관점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과 고백으로 이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2. '율법 조문에 있지 않고 영에 있고'
유대인들은 율법의 세부 항목 하나하나를 지키면서 자신의 신앙의 정도를 측정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율법 준수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참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신앙적인 지침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보다는 그런 지침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헌신과 예배의 삶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3. '칭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도 하나님보다는 주변 사람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은 사람의 칭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직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며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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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외면한 사람들

2022. 12. 25. 12:31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2.25.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한복음 1:9-13
제목 : 예수를 외면한 사람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를 왜 몰라봤을까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하여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잘 믿는다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점이 안타까워서 빛과 어둠의 상식적인 원리를 사용하여 예수를 외면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2000년 전의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겠습니다.

1. '깨닫지 못하더라'(5절).
'깨닫다'(헬 : '카타람바노')는 의미는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한 증거를 통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빛이신 예수가 어둠인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이 빛을 '깨닫지 못한' 것은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입니다(참고 요3:19-2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세상의 쾌락과 죄악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기에 외면한 것입니다.

2. '알지 못하였고'(10절').
예수가 빛임을 증언해주기 위해 세례요한까지 왔음에도(참고, 6-8절),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달랐기에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정작 예수님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모른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외면한 것입니다.

3. '영접지 아니하고'(11절).
'영접하다'(헬 : '파라람바노')라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통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왔음에도 영접하지 않은 것은 자기들이 '주인'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생활하기가 불편하고 힘들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를 주인 삼으면 주인의 권세가 주어짐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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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3가지 비전

2022. 12. 18. 12:32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2.18. 주일오전예배
본문 : 갈라디아서 6:17
제목 : 에클레시아의 4가지 비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에클레시아가 추구하려는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모이고 흩어지기만을 반복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중요한 목적을 공유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본문인 17절은 갈라디아서의 결론이자 바울이 에클레시아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신앙고백이며 바울 신앙의 핵심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고백을 우리의 신앙과 에클레시아의 비전과 목적으로 삼아야겠습니다.

1. 예수가 해답되는 삶.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지금까지 전한 말 외에 더해줄 말이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모든 신앙문제에 대하여 예수가 해답이고, 목적이고, 비전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입니다(참고, 15절). 예수님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언저리 문제로 더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는 데서 신앙의 목적과 비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가 주인되는 삶.
'예수의 흔적'에서 '흔적'(헬: 스티그마)이란 '낙인'으로서 노예나 가축의 소유를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이런 표현은 예수가 주인되는 성도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종이라면 주인인 예수만을 따르고 드러내고 자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을 전하고 가르친 것을 상기시킵니다.

3. 예수와 함께 하는 삶.
본문에서 '흔적'을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참고, '스티그마타'). 이것은 바울 자신의 소유 관계뿐만 아니라 바울 스스로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예수의 것으로 낙인을 찍는다는 의미입니다.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모든 것이 예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산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예수의 '낙인들'을 가진 모임이 에클레시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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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3가지 의도

2022. 12. 11. 12:34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2.11. 주일오전예배
본문 : 고린도전서 1:2-3
제목 : 에클레시아의 3가지 의도

 

 

'에클레시아'는 기원전 4~5세기경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서 누구나 익히 일고 있는 용어였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신앙공동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명칭을 신조어가 아닌 기존의 용어를 차용한 것에는 어떤 의도 가 있었을까요?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차용한 의도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본질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1. 에토스(Ethos)가 아닌 로고스(Logos).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해 에클레시아로 모이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수사학>에서 언급한 '에코스' '파고스' '로고스'의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당시 가장 선호되었던 '에토스'를 버리고 '로고스'를 앞세우는 공동체임을 천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각오였습니다.

2. 커뮤니타스(Communitas)와 이뮤니타스(Immunitas)의 조화.
'커뮤니타스'는 개인적인 생활과 공간에서 나와 공공과 공동을 위한 삶으로 헌신하는 것이라면, '이뮤니타스'는 결정된 사실에 대해 주변 상황에 영향받지 않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에클레시아의 의미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를 전파하려는 신앙공동체의 본질과도 같았습니다.

3. 참석(Attending)이 아닌 참여(Participation).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하는 에클레시아는 단순히 모임에 '참석'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열띤 토론과 설득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온전히 순종하고 헌신하는 '참여'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이런한 에클레시아가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헌신과 순종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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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4.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2. 12. 04. 주일오전예배
본문 : 에베소서 5:29-33(신약 316면)
제목 : 에클레시아의 3가지 이미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의 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과 이와 같은 신앙으로 모인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에클레시아를 소개하고 있는데 '나라' '가정' '몸'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 특징을 소개합니다. 이런 특징들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신앙공동체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1. 나라 = 세상 나라와 구별되는 거룩성(참고, 행5:30-32).
에클레시아나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영적 역역입니다. 이런 모습을 세상에서 쉽게 경험하는 '나라'의 이미지로 설명하는데, 나라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 나라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통해 세상 나라와 다름을 드러내는 것이 '거룩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2.  가정 = 다름을 뛰어넘는 사랑(참고, 마12:49-50).
구약시대의 성도와 신약시대의 성도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에 있습니다. 에클레시아에서는 하난미을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성도들 간에는 형제 또는 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다름'의 경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하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임을 말해 줍니다.

3. 몸 = 각 지체가 가진 기능의 유기적 연합(참고, 고전12:27).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에클레시아에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가진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는 곳임을 사라마 지체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각 지체가 고유한 기능을 수행할 때 건강한 상태가 되듯, 모든 성도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지체와 유기적인 연합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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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3가지 목적

2022. 11. 27.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1.27. 주일오전예배
본문 : 누가복음 4:42-44
제목 : 에클레시아의 3가지 목적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본받고 따라야 할 가장 완벽한 모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친히 자기 삶과 사역의 목적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과 그 공동체도 함께 공유되어야 합니다. 초기 에클레시아는 이러한 예수님의 목적에 충실히 따랐고 실천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다양화된 사회를 살아가더라도 이러한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확인하여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부터 가졌던 계획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주인과 왕으로 섬기며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 대상 중에서 같은 형상으로 지은 인간을 통해 더욱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클레시아(교회)였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공동체로 세웠습니다.

2. 복음.
예수님 당시의 복음('유앙겔리온')은 황제의 취임이나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복음의 의미를 예수와 제자들은 '예수가 왕'이며,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승리'라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였고, 이를 믿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에클레시아였습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의 목적은 복음을 알고, 믿고, 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3. 보내심.
에클레시아의 '사도성'은 공동체가 세상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보냄 받는 공동체임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듯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가지고 자신이 속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담장을 높이 쌓기보다는 복음의 소통을 위한 길을 놓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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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세 가지 기둥

2022. 11. 20. 12:30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1.2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한복음 16:31-33
제목 : 에클레시아의 세 가지 기둥

 

 

지난주 '에클레시아의 세 가지 기초'에 이어서 에클레시아가 힘든 여러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서 갈 수 있었던 '기둥'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여 버리고 도망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초기 에클레시아에 임했던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습니다. 사람이나 환경에 영향받지 않고 튼튼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1. 관계.
에클레시아의 설립목적은 어떤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도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하게 함으로 영광 받기 위함이 아니라, '관계'를 맺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함께 계심으로 제자들의 배신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목적인 곳입니다.

2.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맏아들을 향해 안타까워하는 것이 '함께' 살면서도 모든 것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듯, '함께'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존재의 의미(Being)가 아니라, 삶을 함께 누리며 동거하는 생활의 의미(Doing)입니다.

3. '안에'
예수님은 혼자서도 세상을 이기셨지만, 인간은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단지 인간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 '안에' 거함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말하듯 '안에' 거한다는 것이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양분을 먹고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영적 자양분을 통해 살아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