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6. 24. 주일 오전예배
레위기 11:44-45
2018. 06. 24. 주일 오전예배
레위기 11:44-45
2018. 06. 17.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12:1-5
2018. 06. 10.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11:5-13
지난주에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18장과 연관해서 본문의 기초적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것은 기도할 때 무조건 '강청'하거나 일방적인 요구를 끈기있게(?)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친밀한 기도.
간청함('아나이데이아(anaideia)')은 아무 때나 달려가서 자신의 필요를 요구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전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어느때든지 뻔뻔하고(?)부끄럼없이(?) '힐요하니 주세요~'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평소에 예배, 말씀,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친미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2. 기도의 내용.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친구의 어려움'을 위해 뻔뻔하게' 찾아간 것처럼 이웃을 섬기는 기도를 말씀합니다(참고 마7:12). 눅18:3에 등장하는 괍의 간구도 '원한(정의)'에 관한 것이기에 불의한 재팜관이 과부의 간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바라는 '믿음(눅18:8)'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고 낙힘하지 않는 믿음입니다(눅18:1).
3. 기도의 목적.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에 대하여 마7:11에서는 단순히 '좋은 것'으로 말씀하나, 누가복음에서는 '좋은 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설물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문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오직 성령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구하는('하나님의 얼굴')것이어야 합니다.
2018. 06. 03.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11:5-13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반면에 기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마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흐릿한 성경지식은 희미한 신앙생활을 만듭ㄴ다. 그 결과 믿음의 확신과 담대함이 없는 단순한 교회생활에 머물게 됩니다. 바른 말씀으로 바른 기도에 힘씁시다.
1. 8절의 '간청함'의 의미.
원어로는 '아나이데이아(anaideia)라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 단 한번 사용된 단어로서 '무례하다' '뻔뻔스럽다' '부끄럼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간청함(강청함)'으로 번역되면서 원어가 가진 의미보다는 번역된 의미가 강하게 전달되어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의미로 인식되버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이와는 다릅니다.
2. 마 7:7-12의 내용과 비교.
본문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 7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6:5-15에 '주기도문'에 관해 말쓰마셨기에, 이 본문은 또다시 기도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12절의 '대접받고자 한다면 대접하라'는 말씀을 전하려는 목적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간절하고 끈기있게' 기도하라는 의미보다는 이웃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3. 오늘 본문의 의미.
'밤중에 찬아온 친구를 위해 떡을 빌리는 이야기'에서 '간청함'이란 간절히 기도하는 의미보다는 '비록 깊은 밤에 무례하지만' 친구를 위하여 떡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고 동일하게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열심을 낸다는 의미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기도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기도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해야 바른 기도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2018. 05. 27. 주일 오전예배
시편 91:14-16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전능자의 그늘'이란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덧입히시기에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이게 주시는 최대의 선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참고 요4:10). 하나님의 그늘 속에 있으면 인생의 기쁨가 만족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면 구원받습니다(11절 상).
본문에 나오는 '사랑'의 원어는 '하솨크'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착 달라 붙는다', '딱 붙어있다'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끝까지 붙어있으면 하나님이 건져주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는 믿음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 높여 주십니다(14절 하).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함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하나님의 성품, 성향, 의도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외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면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3. 기도하면 응다하십니다(15절 상).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요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우리의 기도에 항상 대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문제해결 자체에 연연ㅇ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방편이 됩니다.
4. 환난 중에도 함께해 주십니다(15-16절).
환난이 두려운 것은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환난이 다가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2018. 05. 20. 주일 오전예배
고린도전서 1:22-24
오늘로 예수애교회가 설립된지도 만 10년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항상 생각하는 것은 '왜 예수애교회가 존재해야 하는가?'입니다. 많은 교회가 있기에 굳이 또 하나의 교회가 있어야 하는가를 반문해 봅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사역의 본질적인 내용과 방향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여 그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훈련하는 교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1. 식당이 많듯 교회도 많습니다.
많은 종류의 식당들이 있는데, 그 중에 오리고기 요리에는 크게 '로스'와 '주물럭'이 있습니다. 고기의 참 맛을 보려면 로스를, 양념 맛을 보려면 주물럭을 주문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본질인 예수님의 맛을 보는 '로스 신앙'이 있다면 여러 가지 양념(?)에 의미를 두는 '주물럭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바로 온갖 양념을 뺀 고기 자체의 '로스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그 분만을 자랑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2. 우리는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합니다.
식당 중에는 '원조'라는 말을 간판 앞에 다는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는 '원조'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외길 인생'이라는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세상을 나날이 변하고 성도들의 요구도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르는 '외길 인생' '외길 신앙'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예수님 외에는 다 사소한 것들입니다.
오리 로스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기 그 자체입니다. 소금이나 기름장이나 고추장 등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요소들은 많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 분을 알고 믿고 순종하는 삶 외에는 다 사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예수님 보다 예수님에 관련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2018. 05. 13.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17:1-5
5월은 가정의 달로 가족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기뻐할 선물을 정성껏 준비했지만 정작 상대방은 감동이 없을 때 난감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성도들은 어떻게 신앙생활해야 할까요? 바른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즐거움을 드리는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기쁴게하는 생활을 합시다.
1. 하나님의 아들을 기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한 다른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케만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참고, 골1:19-20). 예수님만 한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으로 행하는 모든 자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엡1:5).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2. 하나님의 일(삶)을 기뻐합니다.
오늘 변화산의 이야기의 앞뒤에는 특별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언급입니다(16:21-27, 17:9). 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고 있습니다. 마12:18-21의 내용도 예수님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속에 있습니다.
3. 거룩한 헌신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일(삶)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거룩한 헌신'을 성경에서는 '영적예배'라고 합니다(롬12:1). 영적예배란 초대교회 당시의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제사나 의식과 는 달리 예수님으로 인한 전혀 다른 예배를 의미합니다(요4:23-24). 교회 안의 예배예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거룩히 구별된 삶의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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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5. 06. 주일 오전예배
고린도후서 12:9-10
세상적인 가치간과 성경적인 가치관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세상중에 살다보면 이러한 다름을 망각하고 세상의 기준으로 신앙생활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적인 삶으로 인한 '자랑거리'는 어떤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가 추구하고 세상에 자랑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1.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 자랑입니다.
바울은 육체적인 질벼으로 인해 간절히 기도한 결과, 치료되기 보다는 이런 '약함'의 의미를 깨닫고 오히려 기뻐하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단순히 우리의 '약함'이 아니라 '해석되어진 약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함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그 약함의 현상이 아니라 그 의미로 인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이자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은 말슴으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2.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랑입니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몸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더 많으 결과를 얻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육적이 회복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참고, 갈6:14, 빌3:3). 우리의 만족이나 성공보다는 예수님을 드러내고,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3. 최고가 아니라 최우선이 자랑입니다.
세상적인 가치는 '최고', '최대', '최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치는 '최우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은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간의 남은 '짜투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간의 '가장 먼저'를 구별하여 드리는 신앙의 모습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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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29.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1:19-21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순간순간 확인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기 전에 항상 '가데스바네아'(또는 '가데스')에 머물게 합니다. 우리 신앙의 가데스바네아는 어디일까요?
1. 가데스바네아
이스라엘 남쪽 광야에 있는 곳으로 '가데스'('카도쉬' = 성별, 구별)의 원래의 이름은 '엔미스밧'(창14:7, '아인'(샘, 눈) + '미슈파트'(심판, 판단))입니다. 원래는 '판단하는 눈' 또는 '심판의 샘'이란 이름을 가진 곳인데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란 '가데스'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네아'란 그 뜻이 분명치 않지만 '성소'또는 '특별한 곳'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에서는 '가데스'와 '가데스바네아'를 혼용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믿음과 현실사이에서의 선택의 순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말씀과 성막을 통한 예배방법을 배우고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 간 곳이 가데스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10명의 가나안 정탐꾼들의 정탐보고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어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은혜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의 방법과 나의 방법사이에서의 선택의 순간.
38년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가데스로 옵니다(민20:1). 그곳에서 물이 없어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반석에서 물을 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로인해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땅에 못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지 확인하고자 날마다 '가데스바네아'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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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22.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10:25-37
'어떻게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참고, 눅18:18). 왜냐하면 '구원'이나 '영생'은 단순한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실체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관해 전문가인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구원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진정한 구원의 참 모습을 발견해 봅시다.
1.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여기며 예수님을 시험하는 율법교사.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구원의 질문을 던지는 율법교사는 지식적으로도, 삶으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자부심과 확신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구원에 대한 확신은 비록 분명한 성경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만의 만족과 교만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진정한 구원의 삶에 관해 들려주신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2. 구원은 '이와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구원에 관하여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바가 무엇인지 정확학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옳음'(헬: '디카이오스')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있는 지식대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행함만으로의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합당한 실천적인 삶으로의 구원입니다.
3. 결국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에 28절 '이를 행하라'하시고 37절에서도 '이와 같이 하라'하시면서 행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사랑(공의)와 이웃사랑(정의)의 구체적인 행함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음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영생의 문제를 질문하는 부자관원에게도 '나를 따르라'(눈18:22)고 하셨듯이 구원에 이르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사마리아사람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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