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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2023. 10. 15.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0. 15. 주일오전예배
본문: 에베소서 2:14-20
제목: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무장단체와의 전쟁 상황이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의 배경이자 무대이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데 있어서 바른 성경적 관점과 이해를 바탕으로 분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 옳으냐?', '누구 편이냐?'의 논쟁을 넘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시는 방향을 바르게 인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1. 갈등의 원인.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으로 가나안인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다가, 출애굽으로 인해 정복 전쟁으로 국가가 세워지면서 갈등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를 세우며 기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집니다.

2. 성경적 이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윗의 언약(삼하 7:13)의 성취를 믿고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데,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이자 이슬람 국가들과 충돌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언약이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3. 갈등의 해법과 기도 제목.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인해 더 이상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며, 특정 지역에 세워지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며, 예수의 이름으로 예배하는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이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사라지고 모든 믿는 자들이 한 형제요 자매가 되며 새 피조물들이 되었음을 알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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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직분

2023. 10. 8. 12:1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0. 08. 주일오전예배
본문: 에베소서 4:1-12
제목: 교회와 직분

 

 

오늘은 권사를 선출하는 공동의회가 있는 날입니다. 권사의 직분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미와 기능을 수행해야 진정한 존재의 의미와 가칭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여러 분야의 직분자가 갖추어야 할 신앙 자세와 태도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1. 하나됨을 유지하는 직분입니다(3-6절).
교회는 하나님이 이미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 곳이기에 직분자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보다는 먼저 교회의 하나됨을 잘 유지해 나가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 겸손하게 감당해야 합니다(7-10절).
본문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결과임을 설명합니다. 이는 높아짐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짐으로써 하나님의 높임을 받는다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그래서 직분자는 겸손하게 낮아지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3. 말씀에 헌신해야 합니다(11절).
교회의 5가지 직임을 소개하는데 공통적으로 모두 '말씀'에 관련된 직분입니다. 이는 각각의 특징과 기능을 가진 직분일지라도 직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 있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말씀에서 떠난 열심은 결국 자기의 만족에 불과합니다.

4. 성도들을 양육해야 합니다(12절).
직분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온전한 신앙인으로 양육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직분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동참하도록 가르치고 권면한고 인도하는 직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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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장로

2023. 10. 1. 12:21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0. 01.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14:23-26
제목 : 교회와 장로

 

 

일반 교회에 있는 장로직은 다분히 교회 역사 속에서 파생된 직분인데, 이것이 마치 장로직의 원형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합니다. 성경적 장로는 오늘날의 자로직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전도여행을 하면서 개척한 교회에 그 책임자로 자로를 세웠습니다. 아직 신앙의 체계가 완성되기 전 상황에서 장로를 세운 의도와 의미를 생각하면서 예수애교회 에클레이사의 의미와 사역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봅시다.

1. 교회를 섬기는 직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개척한 각 교회마다 '장로'를 임명했습니다. 어찌 보면 초신자에 불과한 신앙 상태지만 세워진 교회를 책임지고 섬길만한 헌신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나 요한도 교회 내의 가르침을 전할 때 자신들을 '장로'라고 호칭하는 것에서 보듯이(참고, 벧전5:1, 요이1:1) 장로는 교회를 책임지는 직분입니다.

2. 성도를 섬기는 직분입니다.
당시 세워진 교회는 특정인의 가정에 세워진 에클레시아였습니다. '교회'라는 의미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소수의 공동체였기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차별없이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여러 가지로 섬김을 다하는 직분입니다. 성경적 장로는 실질적으로 성도를 신앙으로 섬기는 자입니다.

3. 영성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책임을 맡은 자들이기에 강조되는 것은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영성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금식기도'를 하며 예수께 '헌신'(위탁)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는 장로의 사역이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이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나옴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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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는 길

2023. 9. 24. 12:21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09. 24. 주일오전예배
본문 : 누가복음 4:16-20
제목 : 고향 가는 길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사방으로 소문나서 뭇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기 시작했습니다(참고, 14-15절). 그러다가 처음으로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해야 할 사적이 생겼습니다. 너무나 친근하고 익숙한 고향을 방문하는 것에는 거리낄 것이 없으나 이번 방문길은 굳은 각오가 특별한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을 향해 옮겨가시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 추석 명절에 고향 가는 길을 준비해 봅시다.

1. 예수님의 준비(17-19절).
회당에서 읽은 이사야 61장의 말씀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암송하고 있고, 대망하며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를 통한 회복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자신임을 선언하기 위함입니다.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도 함께 있는 회당에서 자신의 신분과 사명 선언은 곧 자기 신앙의 '커밍-아웃'인 동시에 신앙 고백입니다.

2. 고향 사람들의 반응(22-23, 28-29절).
정작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22절).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외적 반응뿐만 아니라 내면의 소리까지 알고 계셨습니다(23절). 결국에는 가장 가까운 사회적 공동체를 형성했던 고향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기까지 처하게 됩니다(29절).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3. 예수님의 반응(24, 30절).
예수님의 고향 가는 길은 가벼운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육적이고 사회적 관계 속에 형성된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영적 신분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직면하게 될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닙니다. 어쩌면 복음에 대한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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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보기 시작할 때

2023. 9. 17.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09. 17. 주일오전예배
본문 : 고린도후서 3:13-18
제목 : 그리스도를 보기 시잘 할 때

 

 

사도 바울은 한때 고린도 교인들에게 여러가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오해가 풀린 후 지난 소회를 담담히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주변 상황이나 내적 갈등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믿음을 지키며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처럼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분별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배워봅시다.

1. 사람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봅시다.
바울은 자신을 모세와 비교하면서 "더욱 영광"된 직분을 수행한다고 당당히 말합니다(8-11절). 그 이유는 모세의 수건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은 없어질 모세 얼굴의 영광을 주목했다면(참고, 출34:29-35), 자신은 수건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있다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2.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시다.
모세 얼굴에 있는 영광은 곧 없어질 영광입니다(참고, 7, 13절). 모세는 이것을 알기에 수건으로 가렸지만 정작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수건에 가려진 영광에 더 관심 가집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을 벗고 '주의 영광'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예수를 닮아가려고 할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3. 성령으로 삽시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의 지식이나 계획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17절, 18절). 비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담대함 때문이라면 내 안에 임재하는 성령을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살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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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예레미야

2023. 9. 10.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09. 1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예레미야 1:1-3
제목 : 21세기 예레미야

 

 

목요 말씀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번 학기부터 예레미야서를 함께 공부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가장 암울하고 혼란한 유다의 멸망 막바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외부의 위협과 내적 갈등과 신앙적 외로움과 싸웠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영적 환경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해야 할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레미야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불꽃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1. 불행한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1절 상).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성읍입니다. 솔로몬과 왕위 쟁탈을 벌였던 아도니야의 편에 선 제사장 아비아달이 추방된 곳이기도 합니다(왕상2:26-27). 예레미야는 추방당하여 몰락한 제사장의 후예로서 절망과 불만에 빠지기보다는 믿음으로 헌신하여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합니다(1절 하).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임이 분명한데도 '예레미야의 말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기계적으로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먼저 예레미야 속에서 이해되고 깨달아지고 적용되어진 말씀이 선포된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는 갈등과 고뇌가 묻어있습니다.

3. 하나님께 헌신합니다(2-3절).
요시야 13년(BC 627)부터 시드기야 11년(BC 586)까지의 시기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기까지 역사상 가장 불행한 때입니다. 이런 시대적 운명 앞에 청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에는 기적이나 이적보다는 매 맞고, 갇히고, 조롱당하는 일을 겪지만, 묵묵히 인생의 한가운데 토막을 기꺼이 내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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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탕'과 '돌마' 중 누가 더 문제일까?

2023. 9. 3. 12:2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9.03. 주일오전예배
본문: 호세아 3:1-5
제목: '돌탕'과 '돌마' 중 누가 더 문제일까?

 

 

신약성경에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눅 15장)가 있다면, 구약성경에는 가정을 버리고 도망간 방탕한 아내를 되찾아 오는 이야기기 있습니다. 이런 '돌탕'과 '돌마' 중에 누가 더 문젯거리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누가 더 문제일지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오히려 그들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사랑하고 용납하라는 메시지만 있습니다. 호세아는 사랑할 수 없는 아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께 소망이 있습니다(1절).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 안에 있는 풍성함보다는 세상적인 상황이나 자기 능력을 더 의지합니다. 호세아는 자기 아내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2.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세웁니다(2-3절).
우상숭배와 불순종함으로 타락하는 북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정성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그대로 반영되어서 음란한 아내로 인해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라는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이에 호세아는 자기감정을 극복하고('헤렘') 아내의 속전을 지불하여 '구속'함으로써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부부의 사랑을 넘어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갑니다(4-5절).
단순히 한 가정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사랑으로 승화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고', '찾고',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총(히:토브 = 좋음, 선, 아름다움)'을 누려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이 순종하여서 한 가정이 회복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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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헤렘'

2023. 8. 27.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8.27. 주일오전예배
본문: 에스겔 3:17-19
제목: 그리스도인의 '헤렘'

 

 

'헤렘'의 영향력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야간의 사건(수 7장)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공동체가 고난 당하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공동체가 회복되는 '헤렘'은 구약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일까요?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온전하 '헤렘'으로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되살리는 성도가 됩시다.

1. 헤렘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헤렘'은 구약성경 전체에 약 80회 등장하는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서에 약 40회 나옵니다. 그런데 광야의 삶을 기록한 민수기에는 3회에 그칩니다. 이것은 '헤렘'이 가나안 땅에서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바벨론에서도 에스겔에게 선지자의 삶을 요구하면서 하신 말씀이 또한 '헤렘'입니다.

2. 헤렘은 하나님께 순종의 고백입니다.
가나안 땅에 세워질 나라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방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에스겔도 바벨론 역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기에, 낙심이나 불평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환경 속에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려고 '헤렘'을 말씀하셨습니다.

3. 헤렘은 구원받은 성도의 변화입니다.
결론적으로 '헤렘'은 죽이는 원리가 아니라 살리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구원을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사람'이 시작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헤렘'의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신 것이나 예수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나같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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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헤렘'하라

2023. 8. 20. 10:52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8.2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여호수아 7:10-13
제목 : 예수를 '헤렘'하라

 

 

'헤렘'(=진멸하다, 파괴하다, 바치다, 봉헌하다)은 무조건 이방인들을 죽이고 학살하라는 의미가 아님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헤렘'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아간의 범죄입니다. 하나님의 '헤렘'에 불순종한 아간의 탐욕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로 비화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은 무엇인지 배워봅시다.

1. 헤렘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해 줍니다.
'헤렘'은 한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참고, 수6:18, 7:1). 이 말은 헤렘이 단순히 이방인들을 가나안 땅에서 몰아내는 용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방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렘이 바르게 작동할 때는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표시입니다.

2. 헤렘의 적용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수 6:18, 7:12은 이스라엘이 헤렘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 됨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헤렘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잘 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드려지는' '헤렘'의 삶을 요구하심을 의미합니다. 이 요구에 불응할 때는 실패를, 이에 응할 때는 승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3. 결국 하나님은 아들을 '헤렘'해야만 하셨습니다.
아간의 범죄는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아담의 복사판입니다(참고, 창3:6, 수7:21). 이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 자력으로는 진정한 '헤렘'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죄 없는 아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형벌의 장소인 아골 골짜기를 '내 백성의 소유'로 주시고(사65:10), '소망의 문'(호2:15)으로 삼아 진정한 '헤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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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받으시는 하나님

2023. 8. 16. 19:5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8.13. 주일오전예배
본문: 신명기 7:1-4
제목: 오해받으시는 하나님

 

 

가나인 족속을 '헤렘'(=진멸하다, 파괴하다, 바치다, 봉헌하다)하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하여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그 해석에 따라 이방인에게 무자비한 하나님이 되기도 하고,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헤렘'의 의미를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면서 그동안 오해와 편견에 치우친 하나님 이해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잔인한 분일까요?
'헤렘'은 무조건 죽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혼인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7:22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도록 하신 것을 보면(참고, 삿3:1-2) '헤렘'을 이방 민족을 무조건 진멸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2. '헤렘'의 참 의미는?
'헤렘'의 의도는 우상숭배로부터 이스라엘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이고(참고, 4절, 신20:17-18), 또한 이방인을 '진멸'하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도록 기존의 것을 깨뜨리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헤렘'의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용도 변경'이자 '주도권'을 바꾸는 것입니다(예, 수4장의 라합, 수9-10장의 기브온 사람들, 삿1:22-26).

3. 오해받으시는 하나님.
'헤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통성을 지키며, 이방 민족에게는 기존의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하나님께 헌신케 하는 요청입니다. 따라서 '헤렘'을 요구하는 것은 무자비한 살육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이방 민족까지 하나님 백성 삼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된 이해와 적용으로 잔인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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